측지선 돔을 만든 풀러
등산을 하다보면 산봉우리 부근에서 축구공을 닮은 레이돔(Radome)이라는 건축물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레이더를 보호하기 위해 둘러싸는 돔이라서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비바람으로부터 장비를 보호하는 한편 전자파를 발사해 반사파를 측정하는 레이더의 기능을 잘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전자파를 잘 투과시키기 위해서 기둥을 금속이나 플라스틱으로 세우고 유리섬유 재질의 막으로 덮어주곤 한다.
이런 구조의 건축물을 부르는 보다 일반적인 이름은 측지선 돔(Geodesic Dome)으로, 측지선(구형 표면에 분포하는, 여러 개의 두 점 사이 최단거리)을 따라 당기는 힘이 작용하는 가벼운 직선구조재를 연결시켜 만든다.
측지선 돔은 미국의 건축가 풀러(Richard Buckminster Fuller, 1895~1983)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최초의 측지선 돔은 독일의 바우에르스펠드(Walther Bauersfeld, 1879~1959)가 1922년에 특허를 받고 독일 예나(Jena)에 건립도 했지만, 측지선 돔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대중화에 성공한 풀러에게 모든 명예가 돌아갔다.
풀러는 25개의 특허를 받고 28권의 저서를 냈으며 47개의 대학에서 명예박사를 그리고 미국 건축학회 등에서 수십 개의 상을 받았다. 공개강연을 위해 지구를 57번이나 돌았다는 풀러의 열정이 빛을 본 것으로 보인다.
풀러는 건축 공사로 특허(US Patent 2682235)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원호의 측지선 형상으로 서로 연결된 구형의 프레임을 구성하고 플라스틱 재질의 얇은 막을 씌운 기술에 관한 것이었다.
측지선 돔은 레이돔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경기장, 극장, 온실 및 전람회장 등 다양한 용도로 건설되어, 현재 전 세계에 약 30만 개의 건축물이 세워져 있다. 측지선 돔은 최소 자원을 소비해 최대의 공간을 최대한 아름답게 구현하자는 건축 미학을 가진 풀러의 철학이 구현된 건물로, 구형으로 건설되기도 하고 반구 형상으로 세워지기도 한다.
벅민스터풀러린(Buckminsterfullerene)
측지선 돔은 대형 건축물뿐 아니라 나노 크기의 분자 구조에서도 등장했다. 흑연과 다이아몬드만 알려져 있던 탄소 동소체에 분자형태의 새로운 동소체가 발견된 것이다. 동소체(Allotropy)는 한 종류의 원소로 이루어져있으나 원자배열 등에 차이가 있어 성질이 서로 다른 물질로 존재하는 것을 지칭한다.
라부아지에(Antoine Lavoisier, 1743~1794)가 다이아몬드를 태워서 그 성분이 탄소임을 밝힌 것은 1772년이었고, 셸레(Carl Wilhelm Scheele, 1742~1786)가 흑연도 납이 아니라 탄소임을 발표한 것은 1779년이었다.
흑연(黑紹)은 그 이름에서도 나타나듯이 셸레의 발견 이전에는 납의 한 종류인 검은 납(Black Lead)으로 생각되었다(흑연을 지칭하는 또 다른 영단어인 Graphite는 ‘쓰다’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gráfo에서 유래되었다). 동소체인 다이아몬드와 흑연은 탄소 원자가 결합한 형태의 차이 때문에 가장 단단한 물질이 되기도 하고 종이에 스치면 부스러져서 가루로 되기도 하는 차이를 보인다.
새롭게 발견된 탄소 동소체는 1985년, 미국 라이스대학의 컬(Robert Floyd Curl, Jr.)과 스몰리(Richard Errett Smalley)가 영국에서 온 크로토(Harold Walter Kroto)와 함께 흑연을 기화시키고 남은 잔류물에서 발견했다.
다이아몬드나 흑연처럼 원자 간의 결합구조가 반복되는 결정이 아니라 독립된 분자형태였는데 분자를 이루는 탄소 원자의 수가 60개(C60)나 되었다. 지름이 약 1nm인 이 분자는 12개의 오각형과 20개의 육각형이 삼십이면체를 이루어서 그 모습이 축구공과 유사했다. 탄소원자는 오각형과 육각형의 각 꼭짓점에 위치한다.
발견자들은 분자의 모양에서 축구공과 함께 풀러가 만든 측지선 돔을 떠올린 듯하다. 자신들의 발견에 풀러의 이름을 붙여서 벅민스터풀러린(Buckminsterfullerene)이라는 이름을 붙인 걸 보면 말이다. 그런데 이름이 너무 길다보니, 풀러의 중간 이름을 딴 버키(Bucky)에서 비롯된 버키볼(Bucky Ball) 또는 풀러린(Fullerene)이라고 주로 불린다.
풀러린의 발견 이후 관련 연구가 계속되어 1991년에는 일본의 이이지마(Iijima Sumio)가 탄소나노튜브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탄소나노튜브는 원기둥 모양으로 탄소원자가 배열된 또 다른 동소체이다.
그런데 이보다 한참 앞선 1952년에 이미 구소련에서 탄소나노튜브를 발견했음이 나중에 밝혀지기도 했다. 라두쉬케비치(L. V. Radushkevich)와 루키아노비치(V.M. Lukyanovich)가 러시아어로 쓰인 물리화학회지에 발표를 했지만, 냉전 시기에 교류가 뜸했던 서구의 학지들은 그 내용을 알지 못하고 지나간 것이었다.
1986년에는 보엠(HannsPeter Boehm)이 탄소가 평면으로 배열된 구조인 그래핀이라는 용어를 제안했는데, 흑연을 뜻하는 Graphite의 앞부분과 불포화 탄소화합물을 뜻하는 접미어 ‘-ene’를 합쳐서 만들었다. 탄소나노튜브를 평면에 펼쳐놓으면 그래핀이 된다.
컬과 스몰리 그리고 스코트는 ‘풀러린’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발견 11년만인 1996년 노벨화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하였다. 현재 풀러린은 독성이 없는데다 그 안에 다른 원소를 넣을 수가 있는 특성을 활용해 인체 내로 약물을 전달하는 약물전달시스템(DDS, Drug Delivery System)으로 사용하기 위한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내부에 금속원소를 넣거나 혹은 그 자체를 다른 물질과 혼합하여 고전도성 물질 또는 고강도 물질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도 연구되고 있다. 탄소나노튜브도 고강도 특성 및 높은 전기전도성으로 인해 현재 자전거 구조재용 고강도 재료로 사용되고 있으며, 차세대 배터리에 적용하기 위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풀러린이나 탄소나노튜브 모두 기대했던 만큼 실용적인 쓰임새가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래핀 연구에 많은 연구자들이 뛰어들었던 것은 이미 예언된 구조라는 목표가 보여서이기도 했겠지만 2차원 구조에서 기인한 다양한 응용가능성에 주목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핀(Graphene)
그래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던 저명한 연구팀으로는 미국의 드 히어(Walter de Heer)팀과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 가임(Andre Geim)팀, 그리고 한국 출신인 김필립(Philip Kim)팀이 있었다. 이들은 분자구조가 예측된 그래핀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물리화학적 이론을 개발하면서, 동시에 최초로 그래핀을 합성하거나 발견하기 위한 실험을 계속해나갔다.
그 경쟁에서 승리한 팀은 안드레 가임과 그의 제자인 노보셀로프(Konstantin Novoselov)였는데 , 이들이 사용한 도구는 흑연과 투명 테이프였다. 흑연 표면에 투명 테이프를 붙였다 떼어내는 방식으로 그래핀을 분리해냈다. 이 결과는 고진공 장비를 이용하여 진공증착 등의 방법으로 그래핀을 합성하려던 다른 연구팀을 어이없게 했을 뿐 아니라, 훌륭한 결과는 값비싼 장비가 아닌 창의력에서 얻을 수 있다는 교훈도 남긴 사건이었다.
안드레 가임과 노보셀로프는 ‘2차원적 소재 그래핀에 대한 획기적인 연구’로 2010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풀러린에 이어 그래핀까지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새로운 탄소 동소체에 대한 학문적 가치와 함께 응용가능성이 고려되어서일 것이다. 다만, 가시적인 응용제품이 시장에 등장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안드레 가임은 개구리 피부가 반자성을 가지는 성질을 이용해서 강한 자기장에서 개구리를 둥둥 띄우는 실험으로 2000년도 이그노벨상(IG Nobel Prize)을 받기도 했는데, 이런 엉뚱함이 투명 테이프 사용이라는 기발한 생각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 이그노벨상은 노벨상에 대한 풍자로 미국의 유머과학잡지인 < 기발한 연구연감(Annals of Improbable Research) >이 만든 상인데, 매년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기 며칠 전에 하버드 대학에서 시상식이 열린다. 이그노벨상과 노벨상을 모두 받은 사람은 안드레 가임이 유일하다.
그래핀은 탄소 원자들이 육각형의 격자를 이루며 육각형의 꼭지점에 탄소원자가 위치한다. 벌집처럼 생겼다고 해서 벌집구조(Honeycomb Structure)라고도 부른다.
흑연표면에서 떼어낼 때는 일부 두께가 변할 수도 있겠지만 이론적으로는 원자 한 층으로 이루어진 앓은 막이다.
원자 한 층 구조로 인해서 그래핀은 전자 이동도와 열전도도가 아주 높으며 가시광선의 투과율(97.7%)도 높은 특성을 가진다. 이런 특성을 활용하여 투명전극과 차세대 반도체로 응용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가 진행 중에 있다.
그래핀의 노벨상 수상도 시끄러운 뒷이야기를 많이 낳았다. 주요 연구팀 중 하나를 이끌었던 드 히어는 자신과 김필립이 안드레 가임과 함께 공동수상해야 했다고 강력한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다. 드 히어의 이런 문제 제기는 노벨상 신드롬에 빠진 한국 언론이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사실 김필립은 그래핀의 ‘반정수 양자홀 효과’를 안드레 가임과 비슷한 시기에 발표했고, < Carbon Wonderland >라는 평론 논문을 안드레 가임과 공동 집필하기도 했다.
안드레 가임은 자신의 그룹이 발견한 그래핀 분리방법이 너무 쉽다고 생각했는지 논문만 발표하고, 그 기술을 특허로 출원하지는 않았다. 그 덕분에 투명 테이프를 이용한 그래핀 제조는 누구나 실시 가능한 기술이 되었으니 상업적 생산을 하더라도 문제는 없다.
노벨상은 수상하지 못했지만 김필립은 2008년에 출원했던 그래핀을 활용한 트랜지스터 구조에 관해 미국 특허 2건(US 8659009, US 8445893)을 등록하였다.
과학과 기술 2017년 6월호_ COLUMN_ 기초과학연구에서 실용화까지_ 글: 문환구 변리사
|
작성일 : 17-06-12 10:55
조회 : 4,128
[과학과기술]COLUMN_기초과학연구에서 실용화까지_풀러린과 그래핀_June.2017.pdf (2.9M) [10] DATE : 2017-06-12 10:55:18
http://ebook.kofst.or.kr/book/201706/#page=87 [1802]
